작성일 : 13-05-18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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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다시 찾은 성령의 은혜 - 김경일 부제(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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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성령의 은혜 - 김경일 부제(현 신부님)
광주시민 학살 참상이 일어난 80년 나는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다니던 대학원 총장 사퇴의 주역으로 지목된 나는 피신하는 몸이었던 때 이기도하다. 당시 시대적 요 구라고 생각했던 민주화,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대성당에서 교회청년들을 조직하고 교육하고 투쟁하 는 일이 나의 신앙생활의 내용이 되어 있었다.
이 일을 위해 전문인이 되어 평생을 바치겠다고 신학원에 입학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성탄망일 견진성사를 받고 첫 영성체를 하는 순간 성작속의 포도주가 피로 느껴지면서 피 냄새 가 확 풍겼다.
너무 놀라 소름이 끼친 채 온 몸이 굳어졌었다. 그 후 한 달간은 영성체를 못할 정도로 겁을 먹었고 신앙생활에는 약간의 신비적인 요소가 있는 거구나 깨닫게 되었다.
이듬해 봄 아버지는 기이하게도 두 달간에 같은 장소에서 세 번이나 교통사고를 당하시더니 끝내 돌아가셨다.
기독청년운동에 빠져있던 나는 장례를 치르기가 바쁘게 슬픔을 가누지도 못하는 가족들에게 신학원 입학을 선언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홀로된 어머니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고 동생들은 미친게 아니냐고 아우성이었다. 장남으로서의 책임을 내팽개친 죄로 어머니는 서울에서의 생활비 송금을 끊어버렸다. 1년 동안의 방세를 못내는 신세가 되어 하루 한 끼의 식사를 연명하던 그때에도 도움의 손길은 우연 처럼 계속 이어졌다.
당시 대성당의 성가대는 연습이 잦던 때라 연습 후의 저녁식사가 목표가 되어 소리는 내지 말고 입만 벙긋거리라는 지휘자의 수모를 참아가며 성실하게도 거의 참석하고 있었다. 문제는 자취방이 있는 흑 석동에서 성당까지의 버스비에 있었다. 양복에 넥타이까지 단정히 매고 점잖게 올라타고는 내릴 때 “차비가 없는데요” 하며 겸연적게 한번 웃어주면 안내양들은 어김없이 마주 웃어주며 그냥 내려주는 것이었다. 89번 안내양들이 다 착해 빠지지는 않을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사목연구원에 입학할 즈음 자식을 이길 수 없는 모성의 발동으로 어머니가 생활비를 보내 주셨다. 아주 오랫만에(1년만에) 당당 하게 차비를 냈더니 안내양이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까닭을 물으니 89번 안내양들은 내가 정신이 약 간 이상한 사람으로 알고 있으며 퇴근 후 기숙사에 모이면 그날 내가 버스에 탔느냐 안탔느냐가 주요 화제였다는 것이다.
시련의 먹구름은 우리 집을 에워싸고 조여오고 있었다. 집안의 유일한 어른이신 외할머니가 후두암에 걸려 덜컥 자리에 눕더니 여동생마저 위암수술을 받게 되었다. 할머니 종양에서 나는 악취가 속을 뒤 집었고, 여동생은 밥만 먹으면 옆으로 누워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에는 죽음 의 냄새가 나는 듯 했다. 유머가 넘치던 어머니와 세 딸의 밝은 성격으로 동네 사람이 부러워하던 우 리 집이 흉가로 변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교회갱신운동의 결과로 학교마저 못 다니게 되었다. 89년 여름 주교님은 예수원에 들어가 기도하길 명하셨고 거기서 별 흥미를 못 가진 나는 상주 성당에 실습생으로 갔다. 이때는 여동생의 암수술 재발의 예정시한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사고 사망 후 연이 은 가족들의 불행에 넌더리를 내며 하느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도 어김없는 한바렌틴 신부님의 정오 중보기도 시간에 그분의 뒤에서 무릎을 꿇고 길기만 한 기 도를 감내하고 있었다. 갑자기 신부님이 일어나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약간 거부감이 느껴진다 싶었 는데 엉뚱하게도 내 입에서 거의 괴성에 가까운 방언이 터지면서 30분정도 땀을 흘리며 소리를 질러 댔다. 처음엔 놀라고 중간엔 부끄러웠고 나중엔 자신을 제어하지 못한 내 모습이 싫어졌다. 그러나 그 후부터는 매번 기도만 하면 방언이 튀어 나왔고 어느 날은 기도 중에 동생이 죽지 않는다는 응답을 받았다. 동생은 정확히 1년만에 재발하였고 또 기적처럼 회복되어 얼마 후 결혼하여 잘 살고 있다. 나는 하느님은 살아계시고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믿음이 생기게 되었다.
84년 사목연구원에 복학하여 체험을 간증한 나는 친구들의 비웃음만 받고 다시 소위 ‘운동’의 분위 기로 되돌아갔다. 졸업을 얼마 앞둔 어느날 교회갱신운동을 같이 하였던 ‘춘기’가 별다른 이유없이 방에서 잠들듯 죽어버렸다. 충격이었다. 호쾌한 성격, 따뜻하고 자상한 마음, 탁월하고 예리한 통찰력, 누구나 반할 만큼 좋은 친구였는데 사목연구원에서 나를 만나지만 않았다면 죽기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자책감. 같이 기자생활이나 하자고 간곡히 권유하는 친구를 부추켜 ‘운동권’에 끌어드린 행 위를 뒤늦게 가슴을 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졸업은 했지만 교회에서는 쫓겨난 셈이 되어 지하철 공사장 건축현장 등 노동판을 떠돌게 되었고 마 음은 친구를 잃은 슬픔과 삶의 회한과 세상을 향한 증오로 황폐해 질 때로 황폐해져 있었다.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은 나는 아내와 두달 된 아이를 데리고 예수원에 들어갔다. 주님을 만나야 겠다 는 자각이 생긴 것이다. 예수원 생활 두 달이 지난 어느 중보기도 시간에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당황하면서도 정신없이 울고 또 울었다. 나의 심령에 끼인 죄의 때와 상처와 교만, 위선, 못된 성격, 추하고 비겁하고 용렬한 나의 모습을 참담한 심정이 되어 바라보게 되었다.
도시간이 끝나 창피한 마음에 밖으로 나왔지만 그때 그 순간의 감격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세상 만물의 색깔이 그토록 선명하고 찬란하게 빛날 수 있다니 초록의 잎, 빨강 노랑의 꽃잎들 아!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임을…
예수원 생활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대천덕 신부님의 허락을 받아 예수원 동료들과 ‘더불어 함께’ 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창간호 비용은 예수원에서 부담해 주었고 방문객 주소를 찾아 무작위로 발 송한 잡지는 예수원 예배를 중심으로 그 생활을 소개하는 내용과 예수원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는 성령의 역사와 은혜를 증거 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놀랍게도 매번 잡지제작에 필요한 만큼의 비용이 송금되어 오는 것이었다. 송금이 늘면 부수도 늘리면서 마음에 욕심이 생겼다. 좀더 규모를 늘리고 제대로 된 독특한 잡지로 키워보자는 야심이었다. 여기저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지치고 있었다. 그러나 헛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출판사 허락을 받아서 설교 집을 기획 제작해 보았는 데 이때는 이미 내 일이 아님을 확인하게 되었고 하던 모든 일을 내 손에서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짐을 쌌다. 인간적 야망, 계산이 하느님의 뜻, 때, 방법을 거슬렀을 때 하느님은 제동을 걸으셨 고 나는 불순종의 댓 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예수원을 나와서 교회 밖으로 떠돈 몇 년은 그야말로 만행과 탁발의 세월이었다. 모난 성격은 정을 맞았고 교만한 성격은 꺽이고 또 꺽이면서 우여곡절의 5년을 보내고 시골교회인 초평교회 전도사로 다시 부름을 받게 되어 4년이 흘렀다. 성직자없이 40년 을 이어온 초평교회는 치유와 축마로 인근에 알려진 교회다. 축마를 할 때면 귀신들린 사람이 자신에 게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 ‘너와 함께 죽겠다’고 위협하는 것을 보며 내가 배운 신학이나 논리는 아 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과 굳건한 믿음과 구원의 확신만이 무기요, 방패였다. 절망적인 환자를 나 자신 또는 모두들 특별한 기대감이나 확신 없이 기도했을 때에도 의사도 놀라는 치유의 기적을 체험했을 때 그 감동과 기쁨을 상상해보라. 나는 초평교회에서 성령의 역사를 손으로 잡듯 생생히 체험하면서 성령의 세미한 음성과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지혜를 구하고 기도 하고 응답을 기다리면서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한 발자욱도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 었다.
나같은 사람에게 첫 목회지로 초평교회를 주신 뜻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나는 이제야 겨우 신앙의 기본을 체득하고 그 맛을 알아가는 과정에 있음을 고백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나의 사회참여 신앙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예수살기를 성령의 필터로 반드시 걸르고 검증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날 성령타령 사랑타령을 시대상황을 모르는 아니면 오도하려는 의도가 있는 불순한 말쯤으로 매 도하던 나에게는 이런 시련의 과정들이 꼭 필요했을 것이다. 성령체험을 통해 극복되어야할 나의 결 함과 문제를 아픔으로 보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어떤 신앙양태이든 그게 전부일 수 없고 거기에 안 주해서도 안되고 서 있는 자리가 목표가 아니라 단지 출발의 자리이며 분명한 것은 성령의 인도하 심에 의하지 않고는 어떤 사업도 운동도 목회도 심지어 회개 조차도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사 실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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