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5-23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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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감찰 하시는 하느님 - 임종호 (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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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 하시는 하느님 - 임종호 (현 신부님)
5년 전 이맘때 쯤 나는 성공회 사목신학연구원 성직과정의 2년차 학생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 나는 각별히 사랑한 사람도 미워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그런대로 착하고 겸손했고 머리도 나쁜 편은 아니어서 합리적인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었다. 내 생활은 모범적이라기는 뭐해도 비난 받을 정도도 아니었고 이른바 민중 신학에 많은 관심을 둔 편이었지만 성령운동을 나쁘게 보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는데 당시에는 우습게도 오히려 그것을 내심 자랑으로 여겼던 것 같다. 나같이 여러모로 균형 잡힌(?) 사람은 별로 많지 않으리라고 자부하며 중용의 도를 표방하는 우리 성공회의 성직자로는 내가 꽤 적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최근에야 나는 그때의 나를 두고 하신 하느님의 생각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디모데후서 3장에 이르신 대로 ‘그때에 나는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느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의 노력은 부인하는 자’였던 것이다. 다행히도 속사람을 감찰하시는 하느님께서 곧 나 같은 자가 섬기는 길을 함부로 가지 못하도록 막으셨는데 그 후에도 나는 오히려 한 가닥 하느님을 원망하는 마음까지 더하여 여전히 배신하고 앞뒤를 가리지 않고 자만으로 부풀어서는 하느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고 겉으로는 종교생활을 하는 듯이 보이지만 종교의 힘을 부인하는 삶을 살아왔다.
지난 2월말 어는 재미있는 모임에 참석 했는데 그것은 어느 사역자의 특별한 은사를 중심으로 한 자리였다. 그 사역자는 하느님께로부터 다른 이의 영적 상태에 관해 대언하고 영적치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은사를 받았다는 것이었는데 나도 직접 그이를 통해 내게 하시는 하느님의 직접적인 평가(?) 를 듣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런 일에 대한 성서적인 근거, 교리적 인 평가에 대해서는 더 깊은 논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내게는 매우 유익한 경험이었음을 고백하지 않 을 수 없다. 그 사역자와 대면하기 전에 나는 하느님, 제게 과연 무슨 말씀을 하시렵니까? 하고 기도 하려고 했다. 순간 나는 평소에 얼마나 하느님께 나에 대해 아무것도 말씀드리지 않았던 가를 깨달았 다. 나는 내 머리 속에 나의 하느님을 그렸을 뿐이지 한 번도 하느님을 살아계신 인격으로 대하지 않 았던 것이었다. 그때 나는 내심 내가 성직을 지망했다가 포기한 일에 대해 하느님께서 가볍게 책망하 시고 깊이 위로해 주시길 기대했었다. 그간 사람들에게서 곱지 않은 눈길을 받아왔기에 하느님께는 인정을 받고 싶었다. 하느님께서 그간의 일은 다 용서해 줄 테니 다시 성직의 길로 돌아오라고 하시 면 어쩌지 하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그러나 정작 내가 들은 것은 내가 듣기 원했던 그런 고상하고 위안이 되는 말씀이 아니었다. 도리어 내가 어릴 적에 받은 어떤 상처로 인해 내 자아가 이제껏 온전 히 자라지 못하고 뒤틀려있다는 말씀이었다. 세상에나! 내가 그런 표현을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껏 내가 삶속에서 맺은 열매가 나의 영적상태를 증 언하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남들은 잘 알 수 없고 나 자신마저도 잘 몰랐지만 나는 멸망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렴풋이 이게 아닌데 하는 느낌 속에서 그래도 이정도면 되겠지 하는 내 생각대로 나는 삶을 꾸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주님께서 나를 치유하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을 들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마태 11:28)는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 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 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 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 38-39)
15년이 넘는 동안 이제껏 저는 신앙생활의 주어가 나인 줄로만 알았다. 내가 믿는 것, 내가 사랑하 는 것, 내가 느끼는 것, 내가 이해하는 것, 그것들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 같은 것인지를 모르고 거기에 매달렸다. 죄인인 내게서 나온 모든 것들이 온전치 못한 것들이었다. 죄인인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그 사랑의 하느님이 바로 신앙의 주체이시고 나는 그저 그 사랑을 받아 들이는 수동의 존재에 불과함을 이제 알게 되었다. 하느님께 대한 나의 신실함과 나에 대한 하느님의 신실하심 중 어느 편이 의지할만한 것인가? 하느님께 대한 나의 사랑과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중 어느편이 참된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이제 나는 나의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것을 선택한다.
내 예전의 관심이란 하느님을 아는데 있어서 지적인 이해가 더 우선하는가 아니면 감성적인 느낌이 우선하는가의 문제였다. 이제 생각하면 참 어리석은 접근이었다. 어느 쪽이든 그것은 사람의 편에서 하느님을 규정해 가려는 불순한 시도였던 것이다.
진정 관심을 두어야할 것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뜻에 어떻게 순종하고 헌신하는가 하는 문제임을 이 제는 깨닫는다. 그동안 나는 하느님께 진심으로 순복하지 않으면서도 막연히 하느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는 줄로만 알았다. 마치 내게 무슨 권리라도 있는 것처럼 당연히 나를 구원해 주셔야만 하는 것 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근거 없는 낙관주의였고 올바른 믿음은 아니었다. 하느님은 나를 사랑 하셨지만 내가 나의 교만을 인정하기 까지 아무 일도 하시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실 때 나는 내게 멸망의 가능성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를, 사탄의 세력이 얼마나 위협적인지를 보았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그 위대한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은 현실 속에서도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리라는 하박국 13장 17절 이하의 환성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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