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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5-18 17:03
[간증] 아버지와 딸 - 유명희 전도사(현 신부님)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998  
아버지와 딸 - 유 명 희 전도사(현 신부님)

                                                             
  우리집과 아버지
  내가 어릴 때 기억하는 아버지는 화를 잘 내시고 소리도 잘 지르시는 나에게 이해되지 않는 무섭기만 한 존재였다. “얘 명희야, 이리 온!” 이라든지  “참 잘했구나!”  등등 다정하고 자상한 아버지로서 말씀하시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아버지는 7살에 할머니가 돌아가시어 계모 밑에서 설음 받으며 유년시절을 외롭게 보내셨다. 소학교도 다니다 말아 아버지는 거의 배우지 못하셨다. 청소년시절에 일본에 돈벌러가 철공소에 취직 하여 성실하게 일하며 고향에 돈을 보내 주었다. 그 후 태평양전쟁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엄마를 중매 로 만나 결혼하셨다. 엄마는 신학문에 일찍 접하신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동경 제2여고보를 마친 신 여성이었다. 아버지는 많이 배운 엄마에게 열등감을 갖고 오직 일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시 는 분이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는 저녁 무렵이면 우리 집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며 모두 슬 슬 눈치를 보다가 뭔가 아버지 마음에 안든게 있으면 혼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기름때 묻은 작업 복을 입고 들어오시는 아버지를 보며 집에 있는 가족들은 송구스러워야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혼내 시면 그냥 묵묵히 들으며 감당해야지 대꾸한다는 것은 편안하게 놀게(?) 해주시는 아버지에게 대단한 반역이도 되듯이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늘 어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계셨고, 쌓인 스트레스를 집에서 풀으신 것 같다.
  오빠들을 공부시키려고 애쓰는 엄마는 그렇지 않은 아버지와 참 많은 갈등이 있으셨다. 이런 집안 분위기는 사춘기에 접어들며 나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어 좀처럼 내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만들었고 그런 성격을 스스로 답답해하였다. 위로 오빠 셋에 남동생 하나, 외동딸인 나는 무 척 외로웠다. 친구의 인도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예산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고향인 예산에서 4년 직장생활을 했지만 학문에 대한 욕구와 평생 교회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강한 마음에 이끌려 신학교에 들어갔다. 집에서는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셨지만 심한 반 대는 안하셨다. 엄마는 예산교회에 나오기 시작했고 영세도 받으셨다.


    아버지를 거부함
  신학교생활은 내가 원했던 것인 만큼 책 읽는 재미와 학문에 대한 도전으로 꽤나 흥미 있었다. 나는 여성신학에 몰두하였는데 특히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하는 내용에 박수를 쳤다. 하느님을 아버지라는 남성명사로 부르기에 교회 내 성차별을 가중시킨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아버지’ 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반항과 거부는 내 의식 속 깊숙이 자리하였다. 신학교 시절에는 예수님에 관 한 관심은 컸으나 하느님은 멀게만 느껴졌는데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라는 막연한 의문이었다. 한편 마음 한구석에는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늘 있었다는 것을 떨쳐버릴 수 없다. 어쨌든 여성신 학으로 인한 새로운 관점에서의 가치관은 일종의 통쾌한 희열을 느끼게 했다. 이렇게 신학교 4년, 연 구원 2년 생활이 지나갔다.
  나의 30년의 삶은 마음만 먹으면 다 되는 줄 알고 산 날들이었다. 연구원 졸업하던 89년은 ‘삶은 이런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밀려가면서 깨달아야 했던 한 해였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사람중 한 성(性)에게는 성직과 결혼이 분리될 수 없는 축복이었다. 다른 한성(性)  에게는 그것이 분리되어진 채 선택을 강요받아야 하는 상황은 소중하게 생각해 왔던 두 가지 모두 부 서지지 않을 벽으로 내게 부딪혀 왔다. 약혼했던 성직자의 여자문제는 두 가닥, 세 가닥 꼬이기만 했 고 나와 상관없이 진행되는 상황을 보며 ‘사람의 삶은 드라마를 훨씬 초월 한다’고 생각했다.
내 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토록 관심을 가졌던 여성신학도 막상 나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


  원점에서
나는 넋을 놓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나는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하며 원점으로 가 풀어 보기로 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갈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이 참 고마웠다.
내 콤플렉스, 아버지와 같은 중년 남자 어른들을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나를 종종 발견하곤 했었다.
‘그래, 아버지다!’  ‘아버지로부터 뭔가 풀려져야 한다’  집에 와서 아버지를 가까이 해 보리라 마음먹 었다. 연말이 가까울 때 어떤 분이 “기도를 얼마나 하느냐?”고 물었다. 그 순간 ‘기도를 안했구나 ’하 는 생각이 내 마음을 강하게 때렸다. 기도에 나의 생사가 달려있는 것 같았다. 사실 그 길 밖에 없었 다. 새해 90년이 되며 뭔가 달라져야 한다는 각오아래, 예수원에 다녀왔다. 신학교 다닐 때는 그토록 싫어했던 예수원에 가는 심정은 ‘급기야는 가게 되는구나’ 였다. 예수원에 다녀오고 40일 작정기도를 하며 나를 추스릴 수 있었다. 나는 처음 기도를 해 본 셈인데 기도의 맛에 흠뻑 빠져들었다. 성서를 보며 ‘이런 말씀이 있었다니……’ 처음 보는 말씀들이 너무 많은 것에 놀랐다. …차라리 억울한 일 을 그대로 당하는 것이 어떻습니까?…(고전 7:6) 말씀을 붙잡고 울었다. 그러면서 그 말씀은 견딜힘과 명 분을 주었다. 전에는 하느님 뜻을 사람이 알 수 없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당신 뜻을 구하기만 하면 어 떻 게든 하느님 방법으로 알려 주신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움켜잡으려는 것을 포기하라 하셨다. 일단 나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렸다.
  그때쯤 아버지는 중풍이 약간씩 오고 있었는데 칠십 노인이란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일하러 가 시 다가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지나다 떨어지셨다. 20일간 입원하신 아버지 곁에서 기도도 해 드리고 여러 얘기들을 나누었다. 이때 나눈 얘기가 이전 30년 동안 나눈 얘기보다 많은 것처럼 생각된다. 아버지는 별다른 진전 없이 퇴원하여 집으로 오셨다. 신부님이 오셔서 기도해 주시고 성가도 부르시 면 편안해 하셨다. 마침내 아버지도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요셉’으로 세례를 받으셨다.


    치유와 회복
90년 5월 캐나다 S.O.M.A봉사팀이 온양교회에서 3일간 집회할 때 참석하여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하였다. 더욱 깊은 기도 중에 개인적 욕구는 다 포기해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다. 이때부터는 기도하면 1시간, 2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고 영가가 얼마나 힘차게 솟구쳐 나오는지 차츰 생기를 찾기 시작 하였다. 여름철에 접어들며 하느님께서는 나를 서울 수유리(현 도봉)교회로 인도하셨다. 신부님과 교 인들도 기꺼이 맞아주셨다. 고맙게도 신부님 댁에서 한 달을 지낸 후, 교회 근처에 방을 얻어 여러 달 생활하였다. 아침에는 미사 드리고 밤에는 교회에 가서 혼자 기도하였다. 나에게 그 기간은 건강한 지 체들 간의 교제를 통하여 상처가 속히 아물도록 하신 하느님의 특별하신 섭리였다고 믿는다. 성령께서 연약한 나를 도와 간구해 주심을 알았고 놀랍게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접하며 여러가 지 방법으로 치유 받고 회복되어 갔다. 90년이 저물면서 뵌 아버지는 상당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나를 반가와 하시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버지와 딸
91년 새해 어느 날 ‘천주교 기도의집’에 피정하러 가는 전철 안에서 그날 성서공부시간에 신부님이 ‘여성신학’에 대해서 언급하신 말씀이 맴돌고 있음을 의식했다. 그때 마음속에서 “너한테 ‘아버지’ 소 리를 듣고 싶구나”하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지난해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였고 고백하면서도 나는 이제까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그러면서 피정을 마치고 돌아 온 3일간은 계속 마음이 답 답했다. 뭔지 알 수 없었고 풀리지 않았다. 저녁기도를 마친 후 성서를 읽던 중 “아! 이거였구나!”
창세기 44장 전후하여 아버지 야곱의 요셉과 베냐민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가슴을 파고드는지 아버지 사랑이 절절이 내 영혼에 배어 오는데, 또 하나의 영상이 겹쳐지는 게 있었다. 지난주 집에 내려갔을 때 아버지는 나를 보시더니 활짝 웃으시며
  “너 왔구나. 얼마나 보고 싶었다고, 너는 안보고 싶었니? 이제 봤으니까 됐다, 됐어.”
하시던 아버지. 나는 그 때 너무 이상했다. 아버지 입에서 저런 말씀이 나오다니! 선뜻 내 마음에 들 어 오지 않았었는데 그 말들이 하나하나 그대로 들어와 박히는 거였다. 며칠간 답답했던 것은 내 인 간적인 생각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제한했던 탓으로 성령님의 안타까워하신 감응이었다. 하느님의 일 을 맡기실 무렵 또 하나의 은총을 베푸셨는데 20여년간 속을 썩여온 편도선의 치유였다. 영적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게 치유하시고 또 육체도 치유하셔서 문곡 교회로 보내셨다.


  아버지! 내 마음에 새겨있는 사랑이여!
문곡교회의 하루하루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치는 생활이었다. 아버지의 병세가 더 악화되셨다 는 소식을 간간히 들었지만 부활주일을 지나고야 시간을 내어 아버지를 뵈었을 때 이미 나를 몰라보 셨다. 어느날 “멍-이-야!”하고 어눌하게 나를 부르시고는 전혀 말씀을 못하셨다 한다. 아버지 곁에서 1주일을 지내면서 틈나는 대로 기도드렸다. 사람들을 미워하신 아버지를 용서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 도 드렸다. 아버지 기도가 부족하면 내가 드린 기도를 모두 가져가셔서라도 아버지 마음에 미움이 남아 있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다. 다쳐 누우신지 1년 만에 73세로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지금 아버지가 살아계셨던 그전보다 아버지는 늘 나와 함께 하신다. 나는 지금 ‘아버지’ 라 부르며 기도한다. 진정한 해방과 참 자유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가운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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